1. 이렇게 심한 요구를?
구약(舊約)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거룩한 관계를 체결하면서 요구하십니다. "나는 전능(全能)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行)하여 완전(完全)하라. (개역성경 창세기 17:1)" ... 이것을 영어 성경은 다음과 같이 번역하고 있습니다. I am God Almighty Walk before Me, and be blameless.(NASB), I am the Almighty God walk before me, and be thou perfect.(KJV)
be blameless는 흠이 없는 사람이 되라는 말이고, be thou perfect는 보통 완전하라는 말이니, 답답하고 한숨만 나오게 됩니다. 아니 어떻게 전지전능하다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모르셔도 이렇게 모르실 수 있을까요? 어떻게 사람을 향해서 완전하라고 요구할 수 있으며, 대체 누가 이런 요구를 채울 수 있겠습니까?
이런 과도(過度)하고 지나친 듯한 요구는 신약(新約)에서도 별로 달라지지 않습니다. 마태복음을 보면 예수님은 산상수훈(山上垂訓)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穩全)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穩全)하라.(마태복음 5:48)"
구약보다는 살짝 어감이 부드러워진 것도 같지만, 사실 전혀 그렇지가 못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영어 성경은 이 구절을 다음과 같이 번역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Therefore you are to be perfect, as your heavenly Father is perfect.(NASB)
또 마태복음 5:48의 온전(穩全)이라는 단어는 헬라어 τέλειος(텔레이오스)를 번역한 말로서 골로새서 1:28과 4:12 등에서는 완전(完全)으로 번역되고 있는 단어이기에, 온전(穩全)이나 완전(完全)은 원래 같은 말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이런 요구가 우리를 답답하게 하는 것은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요구하신 것이나, 신약에서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요구하신 수준은 바로 완벽(完璧) 그 자체로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은 나에게 완벽(完璧)을 요구하시는구나...... 아브라함은 우리와 유전자가 달랐는지 모르겠지만... 이건 나하고는 맞지 않아...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냐... 불가능이야... 그러고는 시도(試圖)조차 해보지도 않고 바로 포기하게 됩니다.
2. 살짝 고민해 보면
만일 우리에게 대한 하나님의 요구가 정말 퍼펙트(perfect)한 사람이라면, 이것은 정말 암담한 요구로 느껴집니다. 1982년에 출범한 한국 프로야구에서도 2023년 9월 17일 현재까지 40년이 넘도록 단 한 명도 달성하지 못한 기록이 퍼펙트인데... 이걸 우리 보고 하라고 하는 격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다시 한 번 잘 생각해 보면, 살짝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분명히 하나님이나 예수님은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를 우리 자신보다도 더 잘 알고 계실 터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이런 심한 요구를 하고 계시느냐는 것입니다. 뭔가 이유가 있지는 않을까요?
잘은 모르겠지만, 제가 보기에 이것은 우리의 오해(誤解) 때문에 생기는 절망감(絶望感)이 아닐까 합니다. 왜 이렇게 말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우리가 완전(完全)이라는 말의 의미를 잘 알지 못하고 또 완전(完全)을 완벽(完璧)으로 착각(錯覺)하고 있기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닐까 합니다.
3. 완벽(完璧)의 의미
완벽(完璧)이라는 말은 전국시대(戰國時代) 조(趙)나라와 진(秦)나라 사이에서 화씨벽(和氏璧)이라는 보옥(寶玉)을 둘러싸고 전개된 사건에서 유래된 말입니다.
화씨벽은 원래 초(楚)나라의 변화(卞和)라는 사람이 찾은 옥(玉)의 원석(原石)인데, 온갖 고난의 과정을 거쳐서 천하의 보배로 인정을 받게 됩니다. 그 화씨벽이 어떻게 해서 조(趙)나라 왕의 손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옆에 있던 강대국인 진(秦)나라 왕이 그 화씨벽이 탐이 나서 성(城) 15개를 줄테니 화씨벽과 바꾸자고 제안을 합니다. 진나라의 제안을 거절하자니 강대국인 진나라가 쳐들어올까 겁이 나고, 제안을 받아주자니 화씨벽만 빼앗기고 성은 받지도 못할까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조(趙)나라 왕은 인상여라는 신하에게 어떻게 하면 좋을지 대책을 묻습니다. 인상여는 자기가 화씨벽을 가지고 진나라로 갔다가, 만일 진나라가 성을 넘겨주지 않으면 어떻게 해서든지 화씨벽을 완벽(完璧)하게 가지고 돌아오겠다고 대답을 합니다. 진나라에 도착하니 진나라 왕은 보배만 삼키고 성을 줄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러자 인상여는 속임수를 써서 화씨벽을 다시 손에 넣고, 자기 심복을 통해서 조나라로 돌려보냅니다. 그리고 자신은 진나라에 남아서 진왕의 처분을 기다렸는데, 다행히 진나라 왕은 인상여가 똑똑하게 행동했다고 해서 돌려보내 줬다는 이야기입니다.
완벽(完璧)이라는 말에서 벽(璧)은 목적어가 되고, 완(完)은 동사가 됩니다. 따라서 완벽(完璧)은 '벽(璧)을 완(完)한다'라는 구조의 말이 됩니다. 벽(璧)은 옥(玉)이나 구슬과 같은 보배를 말하고, 완(完)은 흠이나 상처를 입지 않도록 보전한다는 말이니, 완벽(完璧)은 천하의 보배인 화씨벽을 상처 하나 나는 일 없이 온전하게 잘 지키고 간수한다는 뜻의 말이 됩니다.
4. 완전(完全)의 의미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완전(完全)은 무슨 뜻일까요? 완벽(完璧)이나 완전(完全)이나 모두 완(完)이라는 글자를 품고 있다는 점은 같으니, 결국 차이점은 전(全)이라는 글자에서 찾아야 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렇다면 전(全)이라는 글자는 무슨 글자일까요? 전(全)이라는 글자는 갑골문의 형태를 볼 수 없어서 무엇을 그린 글자인지를 정확히 추정해 보기는 어려운 상황입니다. 이 全(전)자가 무엇을 그린 글자인지에 대해서 《한자의 뿌리》라는 책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全(전)은 거푸집이 온전하게 닫혀 있는 모양이거나, 쇳물을 부어넣고 알맞은 온도에서 식힌 뒤 아직 개탁하지 않은 상태를 의미하는 글자이다.
- 김언종.2020.《한자의 뿌리》(주)문학동네:경기도 파주

위의 그림 중에서 왼쪽 두 개는 金(금)자의 금문(金文)이며, 오른쪽 글자는 全(전)이라는 글자입니다.《한자의 뿌리》에서 밝히고 있듯이 全(전)이라는 글자는 쇠를 뜻하는 金(금)이라는 글자에서, 거푸집에서 흘러내리고 있는 쇳물을 표현한 점 두 개를 뺀 형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全(전)은 거푸집을 닫은 모양을 그린 글자 또는 쇳물을 붓고 주물(鑄物)이 완성되기를 기다리는 것을 그린 글자라고 한 것입니다.
5. 완벽(完璧)과 완전(完全)의 차이
이제 궁금증을 풀 준비는 어느 정도 된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렇다면 완벽(完璧)과 완전(完全)은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일까요?
완벽(完璧)은 이미 최고의 상태로 완성된 어떤 것을 흠이 나지 않도록 잘 유지하고 보존하는 개념입니다. 이미 천하 제일의 보배인 화씨벽이 그 고귀한 성품을 훼손하지 않도록 잘 유지하고 보존하는 것이 완벽(完璧)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완전(完全)은 무(無)에서 시작하여 인고(忍苦)의 과정을 거쳐 서서히 온전한 형태를 갖추도록 완성시켜 나가는 개념이며, 차근차근 다듬어 나가는 절차탁마(切磋琢磨)의 개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텅빈 거푸집에 펄펄 끓는 쇳물을 부어서 원하는 형태의 물건을 만들어 내는 것이 바로 주조(鑄造)의 과정이고, 全(전)의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6. 주님의 요구
하나님과 예수님은 우리에게 완벽(完璧)을 요구하신 것이 아닙니다. 완벽(完璧)은 이미 완성된 존재에게나 가능한 요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간은 완성된 존재가 아니라, 완성을 향해 나아가야 할 불완전한 존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완벽(完璧)이 아니라 완전(完全)을 명(命)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완벽(完璧)은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완전(完全)은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고, 반드시 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을 명(命)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반드시 해야만 하는 것을 명(命)하셨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완전(完全)을 향해 나아갈 수 있으며, 완전(完全)을 향해 나가가야 하며, 완전(完全)의 경지에 이르러야 합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삶을 돌아보십시오. 하나님께서 그렇게 아끼시는 다윗의 삶은 어떠했습니까? 그들은 완벽(完璧)한 사람들이었습니까? 전혀 그렇지 못했다는 것을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그들은 우리와 동일하게 완벽(完璧)하지 못한 존재들이었습니다. 고난 앞에서 두려워하며 벌벌 떨던 나약한 존재들이었으며, 눈 앞의 유혹에 하지 못할 행동을 서슴치 않았던 보잘 것 없는 존재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런 상태에 머물지 않고 완전(完全)을 향해 나아갔습니다. 그것이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만들어 주었으며, 그것이 다윗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라는 칭호(사도행전 13:22)를 받게 했던 것입니다.
어떠한 흠도 있어서는 안되고, 어떠한 허물도 있어서는 안되는 것은 완전(完全)이 아니라 완벽(完璧)입니다. 그러나 넘어지고 깨어져서 상처 투성이가 될지라도 다시 일어서서 펄펄 끓는 뜨거운 가슴을 안고서 푯대를 향해 작은 발걸음을 내딛는 것은 완벽(完璧)이 아니라 완전(完全)에의 여정(旅程)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바로 그런 길을 걸어가라는 요구(要求)가 아닐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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