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어원(語源)
'믿음'이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우리말 어원사전》은 '믿음'의 동사형인 '믿다'의 어원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 믿다 : 밑[本,底,原] + 다[어미] : 밑다 > 믿다
- 믿나라[本國:본국], 믿곧[本鄕:본향], 믿성[本姓:본성], 믿글월[原文:원문].
김민수 편.《우리말 어원사전》서울:태학사, 1997
위의 설명과 같이, '믿음' 또는 '믿다'라는 말의 뿌리가 되는 '믿'이라는 말은 '밑', 즉 '바닥'과 관련된 말이라고 하겠습니다. 믿음 즉 '신뢰(信賴)'는 모든 것의 '기초'요 '토대'이자 '바닥이 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있다'는 말은 '디디고 설 수 있는 바닥이 있다, 디디고 설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라는 말과 같은 것이라고 하겠으며, '믿겠다'는 말은 '디디고 설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겠다'는 말이라고 하겠습니다. 즉 '믿음'이라는 것은 어떤 대상과의 관계를 쌓아올릴 수 있는 '기초'이자 '기반'이 되는 어떤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믿음이 요구되는 상황
믿음은 어떤 경우에 요구되는 것일까요? 믿음은 기본적으로 확인이나 검증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요구됩니다. '오늘은 수요일이다' 또는 '장미꽃은 빨갛다'라는 말과 같이, 확인이나 검증이 가능한 경우에는 굳이 믿음을 요구할 것이 없습니다. 확인을 통해서 밝혀진 결과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믿음이란 볼 수도 없고, 들어볼 수도 없으며, 만져볼 수도 없어서, 우리의 오감으로 확인하고 검증해 볼 수 없지만, 그래도 그것을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즉 믿음이란 확인이나 검증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그것을 수용하여 내면화 하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사람이 쓴 책이 아닙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그것은 영(靈)의 세계에서 온 것입니다. 다른 책과는 달라서, 땅, 즉 육(肉)의 세상의 결과물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영적(靈的)인 것이라는 말입니다.
영(靈)이니 신(神)이니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한 마디로 말하면, 불가지(不可知:알 수 없음), 불가해(不可解:이해할 수 없음), 불가측(不可測:이럴 것이라고 헤아려 볼 수 없음), 불가증(不可證:증명할 수 없음)의 영역이라는 것입니다. 즉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알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으며, 왜 그런지 그 이치를 헤아려볼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증명하는 것은 더더구나 불가능한 영역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은 우리에게 믿음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믿는 것 이외에는 성경이 말하는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다른 길이 없고,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믿겠다는 결심이 서게 되면, 믿을 수도 없는, 전혀 확인할 수도 없는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되는 마법이 펼쳐집니다. 검증할 수도 없는 것을 그대로 인정하게 될 뿐만 아니라, 그것을 사실로 받아들이고 또 확신하는 단계로 나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자신이 받아들인 것과 양립할 수 없는 사실이나 주장은 배척하게 되는 것이 또한 믿음입니다.
이런 믿음은 신앙의 영역에서만 필요하거나 요구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일상 생활 자체가 믿음의 연속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시장에서 판매하는 물건을 믿지 못한다면, 우리는 그 어떤 물건도 구매할 수 없게 됩니다. 식당에서 나오는 음식의 안전성을 믿지 못한다면, 우리가 어떻게 밖에서 음식을 먹을 수 있겠습니까? 은행을 믿지 못하면, 우리는 모든 돈을 현금으로 가지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그 현금이 위조지폐가 아니라는 것은 또 어떻게 확신할 수 있겠습니까? 온라인 구매의 안전성을 믿지 못한다면, 어떻게 우리가 이런 비대면 시대를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믿을 수 밖에 없으며, 믿고 살아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믿지 않으면 아무 것도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일상 자체가 믿음의 연속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에만 믿음이 요구되는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믿음의 역할(1) - 출발점
믿음이 없다면 상대방과의 관계를 시작할 수 없습니다. 상대방을 믿을 수 없다면 상대방과의 교제를 시작할 수 없고, 상대방에 대한 신뢰가 없다면 상대방과의 거래를 시작할 수 없게 됩니다. 따라서 믿음은 상대방과의 정상적인 관계를 시작할 수 있도록 해 주는 '스위치'와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동차로 치면 시동을 거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기계의 스위치를 켜지 않으면 작업을 시작할 수 없고, 시동을 걸지 않으면 차의 운행을 시작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기계의 스위치를 켜고, 자동차의 시동을 거는 것은 모든 것의 시작이 되고, 출발점이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믿음도 우리가 하나님과 관계를 시작할 수 있도록 해 주는 스위치와 같은 것입니다. 이것 때문에 믿음이 필요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어야 시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믿으라는 것은 '신뢰의 스위치를 켜라'는 말과 같은 것이며, '예수님과의 관계의 시동을 걸어 보라'는 말과 같은 것입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문제가 대두됩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방아간의 기계 스위치를 켰다고, 그냥 떡이 나오느냐는 말입니다. 자동차의 시동을 걸었다고, 차가 목적지에 도착하느냐는 질문입니다. 믿음은 시작점이요, 출발점이 되는 것이지, 믿음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고 '완성'되는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방아간 기계의 스위치를 켰다면, 이제 떡을 만드는 과정을 열심히 수행해야 최종적으로 떡이 나온다는 말이며, 자동차의 시동을 켰다면, 페달을 밟고 핸들을 조정해서 경로를 잘 찾아가야만 원하는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즉 믿음은 그 자체가 '완성'된 것이 아니며, 믿음은 그 자체로서 이미 목적을 '달성'한 것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믿음은 두 존재 사이의 관계를 시작할 수 있게 해 주는 '출발점'이 되는 것에 불과하다는 말입니다.
믿음의 역할(2) : 연결점
믿음은 서로 떨어져 있던 두 존재를 하나로 묶어 연결시켜 주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믿음이 없을 때에는 서로 남남이었던 두 사람이 믿음을 계기로 서로 하나가 되어 교제를 시작할 수 있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믿음이 없었을 때는 하나님과 나는 서로 아무런 관계가 없는 무관한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과 내가 서로 연결되게 됩니다. 연결된다는 것은 떨어져 있던 두 존재가 이어져서 서로 하나로 결합된다는 말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믿음은 자동차의 클러치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람보르기니의 12기통의 강력한 엔진을 풀가동했다고 하더라도 클러치가 떨어져 있다면 1cm도 앞으로 나갈 수 없는데, 12기통의 엔진이 있다고 한들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말입니다. 그러나 클러치를 연결시키는 순간, 세상 그 어떤 자동차도 따라올 수 없는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자동차가 된다는 말입니다. 믿음이란, 클러치처럼, 슈퍼카의 강력한 엔진의 동력을 바퀴에 전달해서 그 강력한 힘이 현실 세계에서 발휘되도록 실현시켜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권능이 아무리 강력하고, 우리를 위해 예비하신 축복이 아무리 크면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믿지 않는다면 아무런 힘을 발휘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내가 믿는 순간, 하나님의 강력한 권능과 엄청난 축복이 우리의 현실 세계에서 발휘될 수 있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렇기에 믿음이란 클러치처럼 하나님의 권능과 축복이 나에게 실현될 수 있도록 연결시켜 주는 연결점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믿어야 하나님과 내가 서로 연결이 되고, 믿어야 하나님의 강력한 권능이 나에게 전달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역할(3) : 축복의 통로
믿음은 하나님의 권능과 축복이 나에게로 쏟아져 들어오는 연결 통로가 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수원지(水源池)에 호수를 연결했다고 하더라도 저절로 물이 쏟아져 들어오는 것은 아닙니다. 모터가 작동해야 수원지의 물이 나의 수도 꼭지를 통해서 흘러나오게 됩니다.
마가복음 제5장에는 혈루병을 앓던 한 여인이 등장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에워싸고 서로 밀고 당기며 예수님의 몸에 손을 대고, 몸을 부딪히게 됩니다(막 5:31). 그러나 그렇게 예수님의 몸에 손을 대고, 몸을 접촉한 수많은 군중들이 있었지만, 접촉을 통해서 예수님의 권능이 흘러나간 사람은 오직 하나에 불과했습니다. 왜 다른 사람들은 예수님의 몸에 손을 접촉했지만 권능을 받지 못했으며, 왜 혈루병의 여인의 떨리는 손길에만 축복의 권능이 흘러가게 되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믿음의 존재 여부의 차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막 5:28).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라 다니고, 예수님을 우러러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구경꾼에 불과했으며, 그들의 믿음은 구경꾼의 믿음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참된 믿음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에게로 하나님의 구원의 권능과 축복이 콸콸콸 쏟아져 들어오게 하는 연결의 통로가 되고, 그 통로를 통해서 하나님의 권능과 축복이 쏟아져 들어오게 만드는 능력이 있습니다. 이것은 손으로 누르는 스위치를 눌러서 작동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오직 마음으로 누르는 스위치인 것입니다. 그 스위치를 눌러서 작동될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것이 바로 믿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 믿다 : 밑[本,底,原] + 다[어미] : 밑다 > 믿다
- 믿나라[本國:본국], 믿곧[本鄕:본향], 믿성[本姓:본성], 믿글월[原文:원문].
김민수 편.《우리말 어원사전》서울:태학사, 1997
'믿'이라는 말의 어원은 '근원[原]'과 관련됩니다. 근원[原]은 샘[源:원]과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근원(根源)은 샘처럼 무엇이 끊임없이 솟아나오는 곳입니다. 따라서 '믿음'이라는 것도 근원(根源)과 같이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온갖 은혜와 권능이 샘물처럼 솟아나오는 근원이 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믿음의 역할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믿음의 역할(4) - 기초·토대
믿음은 또 '밑'이라는 말처럼 어떤 것의 '기초'가 되고, '토대'가 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기초가 되고 토대가 된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기초가 있고 토대가 마련되어 있어야 그 기초 위에 무엇을 올릴 수 있고, 그 토대 위에 무엇을 쌓아갈 수 있다는 말입니다. 기초가 없고, 토대가 마련되어 있지 않다면, 우리는 아무 것도 쌓아올릴 수가 없게 됩니다. 그렇기에 믿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믿음이라는 것이 모든 관계를 구축하고, 신뢰를 쌓아올릴 수 있는 기초가 되고, 토대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너희의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기를 건축하며, 성령으로 기도하며,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기를 지키며, 영생에 이르도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라.(유 1:20,21)
유다서는 믿음이라는 '기초' 위에 우리의 믿음의 삶을 하나하나 쌓아갈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다른 부분은 어떨까요?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여라.(고전 16:13)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입어,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골 2:7)
우리가 너희 믿음을 주관하려는 것이 아니요, 오직 너희 기쁨을 돕는 자가 되려 함이니, 이는 너희가 믿음에 섰음이라.(고후 1:24)
여기에서도 믿음은 우리가 서 있어야 하는 '발판', '토대'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베드로는 우리가 믿음이라는 '토대' 위에 덕과 지식, 절제와 인내, 경건과 형제 우애, 사랑을 하나씩 쌓아 올릴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벧후 1:5~7)
우리의 '믿음'은 우리의 신앙의 '기초'가 되고, '토대'가 됩니다. 그렇기에 그 기초는 흔들리지 않는 튼튼한 '반석' 위에 세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의 '믿음'은 '반석'이신 '그리스도(고전 10:4)' 위에 세워져야 하는 것입니다. 반석 위에 세운 집은 폭풍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무너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믿음이 있다고 하면, 이것은 이제 자신의 믿음의 삶을 건축을 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었다는 말입니다. 나의 믿음의 삶을 세워갈 기초 공사가 마무리되었다는 말입니다. 믿었다고 해서 모든 것이 끝난 것이 아니라, 이제 겨우 기초 공사가 마무리된 상태라는 것입니다. 반석 위에 세운 이 튼튼한 믿음이라는 기초 위에, 자신의 거룩한 믿음의 삶을 하나씩 쌓아 올려 건축해야 하는 '과제'가 남아 있다는 말입니다.
유무(有無)의 문제
믿음은 유무(有無), 즉 있느냐 없느냐 만이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믿음이 있으면 무엇을 합니까? 그 믿음이 손톱보다도 '작은 믿음'이고, 바람만 불어도 꺼져 버리는 '연약한 믿음'이라면, 그러한 믿음이 과연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말입니다. 사방 1cm도 안되는 좁은 믿음 위에 어떻게 높은 건물을 올릴 수 있느냐는 말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있다는 것만 가지고서는 별 의미가 없다는 말입니다. '적은 믿음(마 14:31)'은 '거의 없는 것과 같은 믿음(little faith)'이라고 하여, '믿음이 없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을 향하여 '믿음이 적은 자들아'라고 꾸짖고 계신 것이며, 안타까워 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니 믿음이 '있다'는 것만으로는 자랑할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믿음이 있되, 마태복음 제8장의 백부장의 믿음과 같은 '큰 믿음'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며, 폭풍우가 몰아쳐도 흔들리지 않을 '강한 믿음'이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십 년이 지나고 백 년이 지나도 그대로인 '정체된 믿음', 성장하지 못하는 믿음 보다, '성장하는 믿음', '자라나는 믿음', '열매 맺는 믿음'이 더욱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그렇기에 믿음은 '씨앗'에 비유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믿음을 '겨자씨(마 17:20)'에 비유하고, '씨 뿌리는 비유(마13)'를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믿음이 비록 겨자씨 만큼 작더라도, 그것을 좋은 땅에 뿌리고 잘 가꾸면 삼십 배, 백 배의 결실을 맺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좋은 결실을 풍성히 맺는 믿음이 중요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단지 믿음이 '있다는 것'만으로 자랑할 것이 없다는 말이며, 믿음이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 모든 것이 해결된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믿음이 있노라'라고 하고만 있는 사람은 좋은 씨앗만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씨앗이 한 말[斗:두]이면 무엇에 씁니까? 파종하지 않고 가지고만 있는데... 한 홉의 씨앗이라도 좋은 밭을 찾아서 뿌리고, 열심히 가꾸어야 결실을 맺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믿음이 있노라 하고 가지고만 있는 사람은, 한 달란트를 받아서 한 달란트 그대로 가지고 갔다가 꾸중을 들은 사람과 다르지 않다고 할 것입니다.
믿음의 대상
믿음은 항상 믿는 대상이 있습니다. '내일 축구를 보러 가자'라고 아들에게 말을 했다면, 아들은 무엇을 믿어야 하는 것일까요? '내일 축구를 보러 간다'는 약속을 믿어야 할 것이며, '내일이 되면 축구를 보게 될 것'이라는 것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요구되는 믿음은 무엇을 믿으라는 말이며, 무엇을 믿어야 한다는 말일까요?
1) 예수님
우선 예수께서 나의 구주(救主)가 되신다는 것을 믿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께서 그리스도, 즉 우리를 죄에서 구원해 주실 구원(救援)의 주(主)가 되신다는 것을 믿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을 믿지 않고 싶은 사람은 믿지 않아도 좋습니다. 다만 자신의 죄의 문제를 해결할 다른 방법을 어떻게든 찾아야 할 것입니다.
2) 성경 말씀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로 인정하고 받아들인 사람들은 이제 다음으로 성경의 말씀을 믿어야 할 것입니다. '성경을 믿으라'는 그런 종류의 말씀이 아닙니다. 성경에 기록된 말씀 한 구절 한 구절을 실제로 믿고 받아들여야 한다는 말입니다. 성경 구절을 외우라는 말씀도 아닙니다. 성경 구절을 외우는 것과 성경 말씀을 진정으로 믿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구절이 진짜 살아서 내 삶에 역사하게 되는 것은, 내가 그 말씀을 진정으로 믿게 될 때만 일어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구름잡는 것과 같은 모호한, 이론적인 믿음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자신의 삶에서 역사하는 믿음이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엄청난 약속이 가득한 말씀의 창고에 있는 그 약속들을 내 삶에 구체적·현실적·실제적으로 실현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한마디로 탁상공론(卓上空論)만 하는 이론적이고 추상적·지식적으로만 알고 있는 믿음이 아니라, 나의 삶에서 실제로 실현되는 실학(實學)이 되도록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바로 간절(懇切)함, 절실(切實)함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한 절실함의 진수는 다윗의 시편에서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믿음 위에 자기를 건축하는 삶
믿음은 믿음의 삶의 기초가 되고 토대가 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마련한 토대 위에 하나님과의 관계를 쌓아올리고, 예수님을 따라 가는 삶을 쌓아올려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의 건축이 없는 것은 빈 땅에 기초공사만 마치고 더이상 건축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과 같아서, 아무 쓸모도 없는 헛된 공사만 한 꼴이 되는 것과 같습니다.
이렇게 마련한 믿음의 토대 위에, 자신의 신앙적인 삶을 한 층 한 층 건축해 나가는 것이 바로 '믿음의 삶'이 되겠습니다. 이런 믿음의 삶은 '믿음의 행위'로 나타나게 됩니다. '믿음의 행위'는 성경적 용어로 하면 '순종(順從)'이라고 할 수도 있고, '열매맺는 삶'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순종'이나 '행위'를 이야기하면 거부감부터 나타냅니다. 특히 '행위'라는 말만 나오면 매우 꺼리게 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1) 행위가 비판받는 이유
행위가 문제되는 것은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없는 구약의 율법적 행위'가 문제 되는 것이지, '믿음이 있는 자는 행함이 없어도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없이 구원에 이르려고 하는 구약적 시도가 문제가 된다는 것이지, 예수님을 믿는 자는 믿음에 합당한 삶이 없어도 된다는 말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의를 좇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요, 의의 법을 좇아간 이스라엘은 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어찌 그러하뇨? 이는 저희가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행위에 의지함이라. 부딪힐 돌에 부딪혔느니라.(롬 9:30~32)
이스라엘이 책망을 받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님을 믿지 않고, 율법의 행위로 구원에 이르겠다고 하기 때문이라는 말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믿는 그 믿음을 거부하고, 율법의 행위를 통해서 의(義)를 이루려고 했기 때문에, 사도 바울이 그것이 아니라고 안타까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직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직 믿음'이라는 말이, 믿음 하나만 있으면 되지, 믿는 자는 선한 행위, 의로운 삶이 필요 없다는 말로 오해해서는 곤란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서가 행함이 없는 믿음이 자기를 구원하겠느냐고 반문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약 2:14)
2) 사도바울의 입장
그러나 우리의 구원에 행함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은 사도 바울도 동일하게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모든 일에 전심전력하여 너의 진보를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 네가 네 자신과 가르침을 삼가 이 일을 계속하라. 이것을 행함으로 네 자신과 네게 듣는 자를 구원하리라.(딤전 4:16)
전심전력 믿음의 삶을 계속 행하는 이 실천적인 삶이 너와 너에게 가르침을 듣는 자를 구원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과거형의 구원이 아니라, 미래형의 구원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미 받은 구원이 아니라, 앞으로 받아야 할 구원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가 만일 나의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이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으리라.(고전 15:2)
믿는다고 모든 것이 끝났다는 말이 아닙니다.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헛된 믿음'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 '헛된 믿음'이 무엇입니까? 믿기만 하고, 기초공사만 해놓고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방치하는, '행함이 없는 믿음'인 것입니다. 행함의 문제가 비판받는 것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행함'을 문제 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믿음에 합당한 삶, 즉 행함이 없어도 된다는 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3) 예수님의 입장
사도 바울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도 산상수훈에서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즉 믿음을 기초로 삼아서, 거룩한 믿음의 건축인 믿음의 행위가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
따라서 예수님에 대한 믿음은 구원의 필수 불가결한 전제 조건이 되지만, 그렇다고 행함이 없는 믿음만으로는, 싹이 나지 않고 열매를 맺지 못하는 믿음만으로는, 마지막 날에 영혼의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즉 믿음은 구원의 필요조건이기는 하지만, 믿음이 구원의 충분조건이라고 하기에는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믿음과 아울러 믿음에 걸맞는 행함의 요소가 구원의 필수조건이라는 말입니다.
나의 이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마 7:26,27)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 5:29)
따라서 구원의 시작은 믿음이지만, 믿음의 행위를 통해서 구원을 완성해 나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행위라는 말에 거부감을 느끼는 분이 많은데, 그렇다면 순종 또는 믿음에 합당한 삶이라고 해도 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구원은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믿음’으로 시작해서,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믿음의 삶’ 또는 ‘믿음의 행위’로 완성된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과 '순종'의 두 축이 되는 것입니다. '순종(順從)'이 바로 '행위'로 표현되는 '믿음의 삶'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구원은 '믿음과 순종'을 통해서 완성된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恩惠)와 사도(使徒)의 직분(職分)을 받아 그 이름을 위(爲)하여 모든 이방인(異邦人) 중(中)에서 믿어 순종(順從)케 하나니, 너희도 그들 중(中)에 있어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者)니라.(롬 1:5,6)
그러나 딱 한 단어로 구원의 조건을 들자면, 그것은 ‘은혜’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내가 믿음의 결단을 할 수 있는 것도 사실 은혜요, 나의 믿음을 계속 자라게 하는 것도 은혜이며, 말씀을 깨닫는 것도 은혜이며, 믿음의 행위를 행할 수 있게 해 주는 것도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구원을 두 단어로 표현하자면 ‘믿음과 순종’이라고 하겠으나, 한 단어로 표현하자면 그것은 ‘은혜’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믿음의 과제
따라서 믿는 자들은 믿음의 영역에서 다음과 같은 과제를 안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큰 믿음으로 믿음을 확장시키는 것이며, 강한 믿음으로 믿음을 강화시키는 것이며, 시간과 함께 자라나는 믿음이며, 세월과 함께 성숙되는 믿음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아파트를 짓고 빌딩을 지을 때는, 한 번 끝낸 기초 공사의 내용을 변경할 수 없습니다. 500평의 기초 위에 세운 아파트의 기초를 1,000평으로 확장시킬 수는 없으며, 10mm 철근을 쓴 기초를 20mm 철근으로 바꿀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은 그렇지 않습니다. 100평 짜리 믿음 위에 건물을 올리면서, 기초를 1,000평으로 확장시킬 수 있는 것이 믿음이며, 10mm 철근을 넣은 믿음의 기초를, 20mm, 30mm 철근으로 얼마든지 바꿔 넣을 수 있는 것이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건물의 기초는 고정되어 바꿀 수 없지만, 믿음의 기초는 살아있는 생물(生物)과 같아서 얼마든지 변화가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성장해야 합니다. 아이가 자라듯이 시간이 지날수록 자라나야 합니다. 어린이에서 청소년으로, 청소년에서 청년으로, 장년으로 자라듯이, 우리의 믿음도 성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정체되어 있는 믿음은 곤란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는 내세울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믿음을 잃어버리는 문제
믿음에 있어서 우리가 또 생각해야 할 문제는 믿음을 잃어버릴 수 있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믿음은 잃어버릴 수도 있으며, 빼앗길 수도 있고, 자신이 스스로 버릴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믿음은 있다고 만족해서는 안 되며, 믿음을 큰 믿음, 강한 믿음, 계속 성장하는 믿음으로 키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믿음을 빼앗기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하며, 잃어버리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하며, 버리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씨 뿌리는 비유를 들으라. 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리운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가에 뿌리운 자요, 돌밭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을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가시떨기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치 못하는 자요, 좋은 땅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혹 백 배 혹 육십 배 혹 삼십 배가 되느니라.(마 13:18~23중에서)
빼앗긴 믿음은 자신의 주의(注意) 결핍으로 인해서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믿음을 빼앗기는 경우와, 외부의 환란과 핍박으로 인해서 믿음을 빼앗기는 경우가 있습니다. 국가나 사회의 탄압 또는 주변의 핍박으로 인해서 신앙을 포기하는 사례가 그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환란이나 핍박과 같은 외부적인 어려움이 없이 너무 평안하게 지내게 되면, 오히려 자기 자신이 믿는 사람인지 아닌지조차도 의심스러운 상황을 맞이할 수 있게 되며, 매너리즘에 빠져 살아가는 경우도 있게 될 것입니다.
또 어떤 경우에는 스스로 믿음을 버리고 떠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딤후 4:10에서)
세상의 유혹이나 이익에 마음을 빼앗겨 또는 믿음이 무너져서 스스로 믿음을 저버린 경우가 여기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믿음은 끝까지 지키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외적인 환란이나 핍박에 무너지기도 하고, 내적인 유혹에 이끌려서 스스로 믿음을 저버리기도 하지만, 너무 평안하고 안일한 삶 또한 우리의 믿음을 잃어버리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다음과 같이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마 24:13)
확신의 문제점
믿음에 있어 또 한 가지 주의해야 할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확신의 문제점입니다. 알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는 것을 믿는 것이 믿음이지만, 또한 이 알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는 것을 한 번 믿고 받아들이면, 그것이 내면의 확신(確信), 즉 확고한 신념으로 자리잡게 됩니다. 믿음이 신념으로 자리잡게 되면, 그 다음에는 역(逆)으로 믿음의 부작용이 발생할 수 있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확신의 오류’라고도 하고, ‘확증편향’이라고도 하며, ‘확신의 늪’이라고도 하는 문제입니다.
이것은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자신이 듣고 싶은 것만 듣고, 자신이 믿고 싶은 것만 믿게 되는 문제입니다. 아무리 그것이 그렇지 않다고, 객관적으로 명백한 증거를 제시하더라도, 그것이 자신이 믿고 있는 바와 다르면 결코 받아들이지 않게 되는 문제입니다.
이 문제는 성경의 영역에서도 동일하게 발생합니다. 그래서 어떤 한 가르침에 빠지게 되면, 성경을 읽을 때도 자신의 가르침과 일치되는 구절들만 눈에 들어오게 되고, 자신들의 가르침과 배치되는 또는 맞지 않는 구절은 의도적으로 외면하게 되고, 자신도 모르게 쉽게 잊어버린다는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사람을 투명 인간처럼 취급하는 것만이 문제되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 기록된 말씀 또한 '투명 구절'로 취급하는 문제가 생기게 된다는 것입니다. 확신의 늪에 빠져서, 말씀까지 자기가 취하고 싶은 것만 골라서 취하는 편향성을 보이게 되고, 편식을 하게 되어, 결국은 한 쪽으로 치우친 바르지 못한 길로 빠져서 헤어나지 못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자신이 그렇다고 믿고 인정하며 확신하는, 자신의 신앙적 관점의 색안경을 끼고 성경을 대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각 개인의 잘못이 아닙니다. 이것은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의 문제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뇌가 우리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그렇게 하는 것이기에, 이런 확신의 늪에서 벗어나는 것이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니라는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좀 더 편향되지 않은 진리를 추구하고자 한다면, 내가 믿고 있는 것과 다른 것을 말하는 구절에도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취하고 있는 신앙적 관점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을 바꿀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한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신앙은 흔들리지 않는 것도 중요한 과제가 되지만, 또 잘못 생각하고 있던 것을 바꾸고 고쳐나가는 작업도 매우 중요한 일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불완전한 인간일 뿐이며, 우리는 과오가 없는 신(神)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좋은 방법은 자신의 선입관(先入觀)을 믿지 말고, 항상 의심하고, 항상 점검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믿고 확신하는 것이 과연 진리인지를 항상 의심해 보고, 확인해 보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다른 사람들의 말에 자신의 미래, 자신의 운명을 맡기지 말고, 스스로 점검하고, 스스로 확인하는 자세가 중요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사도행전 17:11의 베뢰아 사람들처럼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詳考)"하는 자세가 필요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것을 위해서는 자신이 읽고 있는 번역본이 아닌 다른 번역본 또는 다른 언어로 성경을 읽어보는 것이 도움이 되기도 합니다. 자신이 늘 읽어서 익숙한 성경은 늘 읽던 버릇이 있어서 그냥 습관처럼 읽게 되지만, 다른 번역본이나 다른 언어로 된 성경은 자신에게 익숙한 문체가 아니기에, 모든 구문에서 '생각의 브레이크'가 걸릴 수 있게 되고, 그렇게 되면 구절 하나하나를 신경을 써서 새로운 시각으로 읽어볼 수 있는 장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현재 한글로 번역된 것만 하더라도 매우 다양한 번역본이 나와 있으므로 한 번 시도해 보신다면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됩니다. 개인적으로는 '대한성서공회'에서 발간한 《새번역 성경》을 읽어보시기를 권해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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